재즈의 도시, 뉴올리언스
미국 남동부에 위치한 뉴올리언스는 루이지애나주의 최대 도시로 손꼽히며 미국 제 2의 항만 도시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718년경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총독에 의해 새워져 프랑스 식민지의 중심지로 번영했던 뉴올리언스는 1764년 에스파니아에게 넘어갔다가 19세기 초에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후 주 전체가 미국으로 매각되면서 비로소 미국 영토가 되었으며 30여년간 주정부가 위치했었다. 뉴올리언스는 흑인노예 시장이 성행했던 곳이기도 했는데 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백인들에게 천대받으며 엄청난 노동 착취를 받았다. 흑인들은 노동요와 블루스, 가스펠 등을 부르며 백인들의 핍박을 달랬는데 이것이 후에 흑백 혼혈 크레올 문화와 뒤섞이며 재즈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뉴올리언스에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홍등가가 있었는데 흑인들은 이곳에서 백인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했고 이것이 곧 재즈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홍등가의 번성은 곧 재즈의 성장을 뜻했다. 약 100여년에 이르는 재즈사에서 뉴올리언스는 재즈의 발상지 혹은 고장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뉴올리언스는 전세계 각지의 수많은 재즈 매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재즈의 고향답게 뉴올리언스 곳곳에는 재즈 연주를 들을 수 있으며 30년째 '뉴올리언스 재즈와 전통 페스티벌'이 열리고도 있다. 재즈에 관련된 뉴올리언스의 주요 명소를 살펴보자면 프렌치 쿼터 북동쪽에 위치한 재즈 박물관이 있다.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로 꼽히는 이곳에는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 사용하던 코넷(Cornet)을 비롯해서 재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콩고 광장’이라 불리기도 하는 3만 9,000여 평에 달하는 루이 암스트롱 공원이 있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지금은 뉴올리언스 내에서 치안이 가장 안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음식점과 상점, 나이트클럽, 스트립쇼 극장들이 늘어서 있는 버번 스트리트 (Bourbon Street)도 빼놓을 수 없는 재즈 명소. 이 거리에는 수준급의 흑인 연주가들이 연주하는 재즈를 들을 수 있는 카페와 나이트 클럽이 많았다.
초기 재즈 스타일, 뉴올리언스 재즈
뉴올리언스 재즈의 발단은 프랑스인과 흑인노예의 혼혈인 크레올(Creole)의해 조직되었던 많은 악단들에 의해서였다. 피부가 흑인보다 밝고 교육을 받았던 크레올은 흑인의 단순한 형태의 음악에 유럽적인 기법이 섞은 음악을 연주하였다. 악기 편성은 지금과 달리 군악대 편성을 퓌하고 있었는데 차츰 소편성 중심으로 변화해갔다. 또한 색소폰과 트럼펫 등 취주악기가 중요한 솔로악기로 사용되었다.
크레올과 흑인들은 길거리나 공원, 결혼식, 장례식, 피크닉, 카니발 등에서 연주를 하였으며, 1900년 경에는 댄스홀이나 술집에 고용되어 연주하였다. 재즈가 가장 성행했던 곳은 바로 스토리빌 (Storyville)로 이곳에서 많은 연주자들이 랙타임 스타일의 피아노 연주와 소편성의 밴드 연주를 선보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곧 백인들도 이들의 연주를 모방하여 댄스음악으로 재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서 1925년 사이가 뉴올리언스 재즈의 전성기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 당시 활동했던 뮤지션들로는 트럼펫과 코넷을 연주하였던 버디 볼든(Buddy Bolden), 벙크 존슨(Bunk Johnson), 킹 올리버(Joe King Oliver), 루이 암스트롱, 키드 오리(Kid Ory), 젤리 롤 모튼(Jelly Roll Morton), 시드니 베세(Sidney Bechet) 그리고 백인 밴드로 오리지날 딕시랜드 재즈 밴드(Original Dixieland Jazz Band)와 뉴 올리안즈 리듬 킹즈(New Orleans Rhythm Kings) 등이 있다.
1917년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뉴 올리언스는 중요 해군기지로 지정되면서 주변의 향락업소들이 문을 닫게 되는데 결국 이곳에서 활동하던 재즈 연주자들은 미시시피강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세인트 루이스(St. Louis), 캔자스(Kansas), 시카고(Chicago) 등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활동을 하게 된다. 특히 시카고는 뉴올리언스 재즈가 직접적으로 전수된 곳으로 루이 암스트롱, 킹 올리버, 키드 오리, 젤리 롤 모튼 같은 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시카고에서 뉴올리언스 출신 재즈 뮤지션들의 음반 레코딩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재즈는 지금까지 많은 스타일을 창출하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지만 역시 그 기초가 되는 것은 뉴올리언스 재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뉴올리언스가 그렇게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일 테고. 현재 재즈 신에서 활동 중인 뉴올리언스 출신의 재즈 뮤지션들을 꼽으라면 역시 마살리스 가를 대표적으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엘리스 마살리스(Ellis Marsalis)를 위시하여 그의 아들들, 브랜포드(Branford), 윈튼(Wynton), 델피요(Delfeayo), 제이슨(Jason) 등이 재즈 신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윈튼 마살리스는 80년대 '신정통주의'를 주창하며 뉴올리언즈 재즈같은 초기 재즈 스타일에 깊은 관심을 투영해왔다.
이외에 윈튼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트럼페터 테렌스 블랜차드(Terence Blanchard), 엘리스 마살리스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던 해리 코닉 주니어(Harry Connick Jr.), 90년대 영라이언으로 주목받았던 트럼페터 니콜라스 페이튼(Nicholas Payton), 도날드 해리슨(Donald Harrison) 등이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나 활동하고 있는 재즈 뮤지션들. 이외에 닥터 존(Dr. John)같은 블루스 뮤지션도 뉴올리언스 출신이며 더티 더즌 브라스 밴드(Dirty Dozen Brass Band)와 갈라틱(Galactic)같은 밴드들 역시 뉴올리언스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뉴올리언스에 재즈는 다시 울려퍼지는가?
미시시피강 어귀에서 160km 가량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 뉴올리언스는 도시 일대가 저습한 지대이며 또 바다에 인접한 탓에 늘 허리케인과 홍수의 위협에 시달려왔다. 때문에 뉴올리언스는 대규모의 상수도와 배수시설 및 방수로를 개설하여 이러한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해왔는데 그래도 이번 카트리나의 재앙은 피할 수 없었다. 카트리나가 지나간 뉴올리언스에는 지금 굶주림과 약탈, 공포로 가득차 있다. 시체 수습과 쓰레기 처리 그리고 도시에 잠긴 물을 빼내는 데에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아예 도시 전체를 이전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
뉴올리언스 재즈의 상징이었던 프렌치 쿼터와 버번 스트리트, 베이신 스트리트가 모두 이번 카트리나 대재앙의 피해를 면치 못했다. 또 1961년 문을 연 이후 밤마다 재즈를 공연하면서 관광객을 끌어들였던 ‘프리저베이션 홀’ 역시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무기한 영업 중단을 밝힌 상황.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휩쓸고 간 지금, 대다수 시민과 많은 재즈 팬은 뉴올리언스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여러 모금행사가 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데 여기에 뉴올리언스 출신의 윈튼과 브랜포드 마살리스 형제가 앞장서서 나서고 있기도 하다. 약 100여년간 매일 재즈 선율이 끊기지 않았던 뉴올리언스, 과연 이곳에서 재즈는 다시 울려퍼질 수 있을까?
재즈의 리듬·프레이징·사운드·블루스 하모니는 아프리카음악의 감각과 미국 흑인 특유의 음악감각에서 나오고, 사용되는 악기·멜로디·하모니는 유럽의 전통적인 수법을 따르고 있다.
재즈의 특색으로는 오프 비트의 리듬에서 나온 스윙감(感), 임프로비제이션(즉흥연주)에 나타난 창조성과 활력, 연주자의 개성을 많이 살린 사운드와 프레이징의 3가지를 들 수 있으며 이것들이 유럽음악·클래식음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재즈의 어원은 야비하고 외설스러운 뜻을 지닌 영국의 고어(古語) 재즈(jazz)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 19세기부터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사용한 성행위(性行爲) 등의 성적(性的) 의미와 열광이라든가 빠른 템포나 리듬을 뜻하는 속어 재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 드럼 연주자 찰스의 이름이 Charles → chas → Jass → Jazz로 전환된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또 재즈피아노 주자이며 작곡가인 제리 롤 모튼은 1902년 자기의 피아노 연주스타일을 재즈라 하고 재즈의 창시자로 자칭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1917년에 녹음된 사상 최초의 재즈 레코드레이블에는 “…Jass Band”라고 인쇄되어 있으며 당시는 jazz가 아니라 jass 또는 jaz, jas 등이었다고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특색을 지닌 흑인음악을 재즈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10년대에 들어서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래그타임음악 또는 래그라고 불렀다. 재즈는 여러 가지 차별이나 기성개념에 반항하면서 퍼레이드의 행진음악에서 댄스음악 그리고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발전하여 지금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대음악의 괄목할 만한 한 분야가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새로운 내용·스타일이 창출될 것으로 생각된다.
1. 모체
재즈의 시초는 17세기 말 이래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인적자원·노동력으로서 수출된 흑인노예의 자손들은 아프리카 민속음악의 감각을 필드 할러라는 단순한 서글픈 노래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교회의 찬송가를 비롯한 유럽음악의 영향을 받아 흑인 특유의 감각을 반영한 흑인영가·워크송(노동가)·체인갱송(쇠사슬에 묶인 죄수의 노래) 등으로 발전하였다. 19세기 말에는 노예해방으로 개인의 생활을 생각할 수 있게 되자 그러한 사생활의 애환을 소박한 형식의 노래로써 표현하게 되었다.
그 노래가 모체의 하나가 된 블루스이다. 또 노예해방 후의 흑인과 크리올(흑인과 백인의 혼혈인:미국에서는 흑인과 프랑스인의 혼혈인)은 예능인으로서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되었고, 19세기 말엽부터는 남부의 흑인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래그타임이라는 율동적인 스타일의 피아노음악이 생겨나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재즈는 아니지만 재즈의 모체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루이지애나주의 뉴올리언스에서는 흑인들에 의한 브라스밴드가 많이 나타났다. 남북전쟁에 패한 남군 군악대의 악기를 흑인들이 싼값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들 브라스밴드는 시(市)의 퍼레이드나 장례행진 때에 행진곡 등을 연주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 밴드의 행진곡도 재즈의 모체의 하나가 되었다.
2. 역사와 스타일의 변천
재즈는 뉴올리언스의 흑인 브라스밴드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흑인들의 밴드는 백인들의 밴드를 본따 유럽음악의 수법에 따른 연주를 하고 있었으나 점차 행진곡 ·래그타임곡 등의 연주에 흑인 특유의 감각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가곡(歌曲)인 블루스도 악기로 연주하게 되었다. 흑인 특유의 리듬감에 래그타임의 영향이 곁들어 그들 가운데는 독보력(讀譜力)은 없어도 멜로디·하모니 등을 외어 원곡(原曲)을 쉽게 하여 연주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전설적인 인물처럼 되어 있는 트럼펫 주자 바디 볼덴은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트럼펫·클라리넷·트롬본의 3관편성(三管編成)에 의한 컬렉티브 임프로비제이션(collective improvisation:집단 즉흥연주)과 그 앙상블 진행스타일이 커다란 특색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뉴올리언스재즈이다. 이 스타일로 백인들이 연주하는 재즈를 딕실랜드재즈라고 하는데 요즘은 구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뉴올리언스의 흑인 재즈맨들은 주로 창가(娼家)가 많은 홍등가(紅燈街) 스토리빌에서 일해 왔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뉴올리언스가 군항(軍港)이 되고 홍등가가 폐쇄되자 트럼펫 연주자 K.올리버를 비롯한 많은 흑인 재즈맨들이 시카고와 뉴욕 등지로 옮겨갔다. 시카고에서 그들은 뉴올리언스재즈의 스타일로 연주를 계속하였는데 그 영향을 받은 젊은 백인 재즈맨들은 뉴올리언스재즈의 스타일에 세련도를 곁들여 연주, 이것이 후에 시카고스타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백인 재즈맨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R.암스트롱과 빅스 바이더백이다. 암스트롱은 1922년 시카고에 나타나 재즈에 있어 솔로(독주)의 중요성을 확립한 인물이며, 백인인 바이더백은 재즈는 흑인이 아니면 연주하지 못한다는 징크스를 깨고 재즈의 전통을 지키면서 새로운 감각의 백인재즈를 창조하여 시카고 백인재즈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시카고의 흑인 재즈맨들 사이에서 피아노에 의한 새로운 블루스주법 부기우기가 나왔다. 한편 뉴욕에서는 뉴올리언스재즈의 영향을 받은 빅밴드에 의한 재즈가 성행했다.
그리하여 재즈음악으로 발전하였는데 흑인 거주지구인 할렘에서는 F.헨더슨, D.엘링턴 등의 독특한 편곡에 의한 재즈스타일도 나왔다. 또 래그타임계 피아노재즈의 새로운 스타일이 J.존슨, P.월러 등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뉴욕에서의 빅밴드재즈의 발전은 이윽고 재즈 전체의 발전을 촉진하게 되었다. 1936년 베니 굿맨악단이 연주한 맹랑한 재즈는 경제불황의 회복기라는 좋은 조건도 있고 해서 압도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굿맨에 이어 T.도시, A.쇼, G.밀러 등의 백인 빅밴드도 인기를 끌었다.
이들 백인악단의 세련된 신선한 댄스 음악은 스윙뮤직으로 불리고 이로부터 스윙재즈시대가 시작되었다. 굿맨악단의 드럼 연주자 징 크루퍼를 비롯한 많은 시카고스타일재즈의 스타들이 이들 악단에서 활약한 사실은 빼놓을 수 없다. 또 빅밴드로부터의 픽업 멤버에 의한 소편성악단(콤보)과 레코드 취입을 위한 재즈, 즉 콤보재즈도 많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솔로의 매력이야 말로 재즈의 매력이라는 사실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스윙재즈의 유행에 따라 주목을 끌게 된 흑인악단 카운트 베시악단은 중부 미주리주(州)의 캔자스에서 1920년대부터 활약하고 있던 베니 모턴악단의 후신(後身)이지만, 간단한 헤드 어레인지를 구사한 자유로운 기분의 연주와 리프스타일의 흥미로운 점에 특징이 있었다. 이것이 캔자스시티재즈이며 베시악단도 뉴욕으로 진출하였다.
1940년대에 들어서자 스윙재즈는 매너리즘에 빠지고 이 상태에서 만족할 수 없는 젊은 재즈맨들에 의하여 새로운 재즈가 탐구되었다. 뉴욕의 52번가에 있는 클럽 민턴하우스 등 잼세션에서 C.크리스티언, D.길레스피, C.파커 등에 의해 비밥(밥이라고도 한다)이 생겨나고 스타일화하였다. 특이한 코드진행과 종래 재즈의 하모니나 리듬의 제약을 무시한 새로운 수법은 당초에는 상당한 비난을 받았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곧 모던재즈의 모체가 되었다.
이 비밥의 수법에 의한 빅밴드재즈가 우디 하먼악단 등의 모던 빅재즈밴드이다. 그리고 비밥은 M.데이비스, S.게츠 등에 의하여 내성적이며 정적인 솔로와 앙상블의 균형이 잡힌 쿨스타일의 재즈를 낳고 다시 R.트리스타노에 의한 유럽 현대음악의 수법을 받아들인 실험적인 재즈도 낳게 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자 모던 빅밴드의 허먼악단, 스턴겐튼악단의 백인 재즈맨에 의한 지적인 재즈가 주목을 끌었다. 그들은 주로 미국의 서해안 로스앤젤레스에서 활약하였기 때문에 보통 웨스트코스트재즈로 불렸는데, S.로저스, J.멀리건이 대표적이다.
한편 뉴욕 등의 동해안에서 비밥의 임프로비제이션에 의한 솔로를 중심으로 한 연주를 계속해온 흑인 재즈맨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 그룹으로서의 조화를 발전시킨 하드밥 혹은 흑인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긴 펑키 등의 명칭으로 웨스트코스트파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들 흑인의 재즈를 이스트코스트재즈라고 하며, A.블레키, 호레스실버, S.멍크, M.데이비스, S.롤린스 등이 이들을 대표했다. 또 쿨재즈와 유럽음악의 영향으로 지적인 실내악적 재즈에 특이성을 보인 J.루이스의 모던재즈 4중주단도 생겨났다.
1950년대 말엽에 알토색소폰 연주자 O.콜먼이 멜로디·하모니·리듬의 3대 요소를 뿌리부터 뒤엎은 독자적인 재즈를 만들어 냈다. 또 선법(旋法)을 탐구한 J.콜트레인, 자유로우면서도 강렬한 색채감을 지닌 색소폰 연주자 A.아일러 등이 활약하고 전위(前衛)재즈가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근래에는 하드·밥·쿨 등 여러 가지 스타일과 수법이 서로 영향을 끼치는 가운데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