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제도는 약 2천 8백 년 전에 화산 폭발로 인해 생겨났으며 8개의 큰 섬들을 포함한 그림같이 아름다운 13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산호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788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상륙하여 비로소 세계에 알려진 하와이 제도는, 당시만 해도 여러 왕들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와이 섬의 한 추장이었던 카메하메하(Kamehameha)가 여러 섬을 평정하고 1795년 이후, 약 백 년간 8대에 걸친 왕조의 틀을 세웠습니다. 그 후 1850년대부터 시작한 이민정책으로 점차 쇠퇴해진 하와이 왕조는 189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가 1898년에 미국과의 합병 조약을 체결, 1959년 미국의 50번째 주로 흡수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기나긴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이 된 세계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던 하와이. 그러나 오늘의 하와이는 가히 지상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합니다. 일년 내내 서늘한 무역풍이 에메랄드 빛 바다를 타고 불어와 습도가 없는 쾌적한 날씨를 제공하고, 맑다 못해 투명한 하늘과 따뜻한 햇살로 인한 청명함은 하와이가 아니고는 맛보기 힘듭니다. 현란한 알로하 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자유로움, 빨간색 하이비스커스(hibiscus)를 머리에 꽂고 해변을 거니는 낭만, 오염되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로운 폴리네시안 문화, 활기 넘치는 다양한 해상 스포츠와 완벽한 레저시설 등은 오늘의 하와이를 지상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손꼽게 하는 매력입니다.
1778년 1월 영국의 탐험가인 제임스 쿡(James Cook)은 두 탐험선 리졸루션(Resolution)과 디스커버리(Discovery) 등 두 척의 탐험선을 지휘하고 호주, 뉴질랜드 연안 탐험과 금성 관측, 남극대륙의 유무를 확인하는 등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넘어가는 수로의 유무를 탐색하기 위하여 타히티 섬에서 북미 쪽으로 항해하다가 우연히 하와이를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탐험 원정을 후원한 영국 해군성의 샌드위치백작 이름을 따서 하와이를 ‘샌드위치 제도’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이 하와이가 세계에 알려진 시초였습니다.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를 발견하기 전까지 하와이는 문자가 없는 구전전승 문화였기 때문에 하와이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다만 서기 300-600년 또는 그 이전에 같은 태평양상의 섬인 말퀴사스 제도와 그 후 950-1200년 경 타히티에서 수많은 사람이 카누를 타고 하와이로 건너왔다는 설이 가장 믿을만한 가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쿡 선장이 하와이 제도를 발견했을 당시는 적동색의 피부색을 가진 건장한 사람들이 각 섬을 중심으로 서로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群雄割據)가 계속되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하와이섬에 왕족 출신으로 수완과 지략이 뛰어난 청년이 나타나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세력을 넓혀 나갔는데 그가 바로 하와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시킨 카메하메하 대왕(Kamehameha the Great)입니다.
카메하메하 대왕은 서양의 진보된 과학을 재빨리 흡수해 하와이 왕국의 발전을 도모했습니다. 총명한 두뇌를 지녔던 그는 백인 선원이었던 존 영(John Young)과 아이작 데이빗(Isaac David)등을 수하에 두고 서구의 새로운 무기를 도입하여 먼저 자기 출생지인 하와이섬의 패권을 장악한 데 이어 마우이, 몰로카이, 그리고 오아후의 누우아누 팔리(Nuuanu Pali, 바람산)에서 벌어진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통일의 기초를 확립하였습니다. (1795년 하와이 왕국 잠정 통일, 1810년 완전 통일)
1819년 카메하메하 1세가 죽자 그의 장남인 카메하메하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하와이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음으로써 혼란의 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메하메하 1세의 애첩이자 거구에 명석한 두뇌를 소유한, 하와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여걸 카아후마누(Kaahumanu)가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주도하에 카푸(kapu, 금기제)를 폐지하였으며 때마침(1820년 4월) 보스턴으로부터 도착한 선교사들로부터 왕실이 앞장서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불과 20여 년 만에 기독교국가로 인정될 정도의 교세 확장을 이루었습니다.
카메하메하 2세가 런던 외유 중 병사함으로써 1824년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여 카메하메하 3세가 되었으며 그의 치하 30여 년이 왕조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시기입니다. 산업 근대화를 이루고 문화 예술도 발전시켰으며 1840년에는 신헌법 발표에 따라 입헌군주국으로 승인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도를 마우이섬의 라하이나(Lahaina)에서 호놀룰루로 옮기고 사회제도도 점차로 정비해 나갔습니다.
카메하메하 3세 때까지 하와이의 최대 수입원은 포경업(捕鯨業)이었습니다. 고래잡이 시기인 봄과 가을이 오면 연간 500여 척의 포경선이 호놀룰루, 라하이나, 힐로, 코나항에 출입하였고 이 도시들은 선박의 수리와 공급품, 술, 도박, 숙박 등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포경업은 고래의 부족과 석유의 등장으로 쇠퇴기에 들어갔으나 다행히 본토는 골드러시(Gold Rush) 시대로 접어들어 서부(LA 및 샌프란시스코)의 해안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하와이가 사탕 공급의 원천지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탕수수 농장은 급성장하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 했습니다. 이에 백인 농장주들은 노동자를 해외로부터 수급하게 되고 그 첫 번째로 중국(1852), 이어서 일본(1868)으로부터 계약 노동자들의 이민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와이의 정치적 균열은 공교롭게도 하와이를 문명의 세계로 이끈 선교사의 후예들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들은 하와이왕조가 방매하는 토지를 사들여 거의 모든 땅을 소유하기 시작하였으며 주요 농산물인 사탕수수를 제일 많이 소비하는 국가인 미국과의 결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실 측과 백인세력 사이에 서서히 권력투쟁이 일어났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시대였고 카메하메하 5세의 통치시대가 1872년 막을 내리면서 카메하메하 직계는 단절되고 왕족 중에서 선거에 의해 선출된 6대왕 루날리오(Lunalio)는 병약하여 1년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유쾌한 군주라는 별명을 가진 제7대 칼라카우아 왕(King Kalakaua)은 하와이인에 의한 왕권회복을 부르짖으며 이올라니 궁전(Iolani Palace)을 세우고 문화예술 진흥에 힘쓰며 미국과 호혜조약을 맺어 하와이 농산물을 무관세로 미 본토에 수출하는 등 제 2의 하와이 왕조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 했으나 기득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백인세력의 압력으로 왕권을 크게 제약하는 신헌법을 공포해야 했고 이런 와중에 건강이 나빠져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양하던 중 사망했습니다.
기독교 신자이며 온건한 성격의 여자로, 백인들이 호락호락하리라 믿고 뒤를 봐 준 제7대왕의 여동생인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가 제8대 여왕에 오르자 예상과 달리 도리어 왕권회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미국과의 합병을 주장했던 백인 기득권층은 이에 놀라 1893년 미 해병대의 도움을 받아 왕궁을 포위하고 압력을 가하여 여왕으로부터 왕권포기 서명을 받아냄으로써 하와이왕조는 막을 내리고 샌포드 돌(Sanford Ballard Dole)을 수반으로 하는 백인 주류의 하와이 공화국(1894-1898)이 탄생하였습니다.친미 백인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하와이는 1898년 스페인 미국전쟁의 발발로 그 군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같은 해 8월 21일 합병안이 미의회를 통과했으며 그 후 1900년에 정식 영토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