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국 이민 역사

by 운영자 posted Feb 2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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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하와이가 더욱 유명해지고 관광의 중심지로 급속히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런 가운데 드디어 1959년 8월 미국의 50번째 주로 승격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하와이는 관광산업뿐 아니라 태평양 지역의 중심지로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미국의 남북전쟁을 전후하여 하와이의 사탕수수 산업은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이에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이 산업을 확대하기 위해 외국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유럽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려 했으나 별로 여의치 않자 아시아에서 노동자를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제일 먼저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왔고 1880년대부터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이주했습니다. 그 후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 정부와 계속 접촉을 갖고 드디어 1902년 11월 고종이 노동 이민을 허락함으로써 한인 노동자들의 이민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의 항구 도시 거리마다 하와이의 풍물, 작업내용, 미국 달러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광고 포스터를 붙이고 노동자를 모집했습니다.
 

 

 

 


1개월에 16달러를 지급한다는 광고는 당시 대기근으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선 노동자들에게는 일확천금의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최초 모집된 한인 이민단은 통역관 2명을 포함하여 총 121명이었습니다. 대부분 인천 내리교회 신도들이었던 이들은 1902년 12월 22일 개릭(Gaelic) 호를 타고 ‘신천지’를 향해 인천항을 떠납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하와이로 직접 갈 수 있는 길이 없어 일본 고베 항(神戶港)을 경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실시된 종합 신체검사로 20명이 탈락하고 101명만이 고베 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호놀룰루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실시, 추가로 15명이 탈락하여 최종적으로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들이 최초의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입니다.이들 한인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남자들로,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기를 원했으나 한인 여성이 거의 없어 결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동양인과 미국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이 있었기 때문에 현지인과도 결혼할 수 없었고, 결혼하러 한국을 다녀온다는 것은 거리와 비용 탓에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것이 사진 결혼입니다.

 

 

서로가 사진을 주고받고, 이 사진을 들고 아가씨가 남자를 만나러 하와이로 건너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950명 정도의 ‘사진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왔습니다.

최초의 ‘사진 신부’는 ‘사라 최’라는 여성으로 1910년 11월 28일(혹은 12월 2일) 호놀룰루에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하와이 국민 총회장을 지낸 이래수씨였습니다. 사진 결혼 2호는 신랑 백만국(당시 39세)씨와 의주 처녀 유명선(당시 23세)양 부부.

 

기록에 의하면 1910년에 시작된 사진 결혼으로 1924년까지 하와이에 951명, 미국 본토에 115명의 한인 사진 신부가 입국했다고 합니다. 사진만 보고 결혼하다 보니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에피소드가 참으로 많았고 문제도 적지 않았습니다. 노동이민을 온 총각들은 결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10~15년 동안 부지런히 일해서 저축을 해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늙은 신랑과 어린 신부가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평균 나이차이는 무려 15살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건너온 아가씨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연분홍빛 희망보다는 척박하고 힘든 고생의 나날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낮에는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했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하며 오로지 자식과 자식교육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1905년 하와이 마우이 섬으로 이민을 온 최용운 할머니가 읊었던 시(詩)에는 그들의 답답함과 슬픔이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강남에 노든 속에
봄바람 소식 실은 배 만리나 떨어져 있으니
친척들과 이별하고 조상님의 묘 버린
슬픔을 뉘 알리요.
새 울어 눈물 보지 못하고
꽃 웃어도 소리 듣지 못하니
좋은 것 뉘가 알고
슬픔인들 뉘가 알리.

힘들고 고단하고 모든 일이 순탄치 않았을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이지만, 우리의 이민 선조들은 조국을 위해 쌈짓돈을 모아 해방 전까지 고국에 무려 300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보냈다고 하니 그 애국심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1914년 하와이에서 군사력을 키우며 일제로부터 무력 독립을 계획하던 박용만은, 미국 유학 후 LA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합니다. 이들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西歐)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했습니다. 또한 외교를 통해 일제 식민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노력하였으며 이승만 본인이 설립한 한인 기독학원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승만은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國民會)를 분열시키고 따로 좌파세력을 규합, 동지회(同志會)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동지회는 미주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왔습니다. 한편 동지회는 1953년 한인 기독학원을 폐교하고 그 건물을 매각하여 남은 돈 18만 달러를 하와이와 인연이 깊은 인천에 기증, 인천과 하와이의 첫 자를 각각 따서 만든 인하대학교 설립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등에 업고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됩니다. 이승만은 이 후 사사오입 등의 수단으로 독재를 이어가려 했으나 4/19 혁명을 통해 그러한 시도는 무산되고 결국 다시 하와이로 망명, 1965년 7월 별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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