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올리언스

뉴올리언스 - 역사

by 운영자 po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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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상당지역이 해수면보다 0.3~3m 낮고 늪지대에 악어가 출몰하는 열악한 땅 뉴올리언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물에 잠겨 폐허로 변한 이 도시는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이 곳에 가장 먼저 정착촌을 건설한 사람은 1718년 프랑스인 식민(植民)개척자인 장 밥티스트 르 뫄이느 드 비엥비유였다. 그는 미시시피강과 폰차트레인 호수 사이의 고지대와 자연제방으로 형성된 이 곳에 도시를 건설했고, 당시 프랑스 재상 필리프 뒤 도를레앙(d’Orl? )의 이름을 따 도시명을 지었다. 이 지역은 이전부터 미 대륙의 토착 원주민과 동물가죽을 교역하고 금광을 캐려는 유럽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뉴올리언스는 미 대륙 깊숙이 흐르는 미시시피강 하구와, 남미의 유럽식민지들과의 교역 통로인 멕시코만에 위치해 교역의 요충지였다. 당시에는 300년 뒤 이 지대가 허리케인에 의해 완전히 물에 잠기리라는 우려는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 도시는 미시시피강 자연제방을 따라서 고지대에 국한돼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시시피강의 잦은 범람과 허리케인에 대비해 1727년에도 길이 1.6km, 폭 5m가 넘는 제방이 만들어졌지만, 이는 고지대를 따라 건설된 것이었다. 1762년 프랑스는 7년전쟁에서 스페인에 패배, 힘들게 건설한 루이지애나를 양도해야 했다. 이어 1700년대 말 잇단 대형 화재로 뉴올리언스의 프랑스식 목조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탔고,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스페인 양식이 포함된 건물들이 ‘프렌치 쿼터’에 새로 들어섰다. 40년 후 나폴레옹은 스페인에 압력을 넣어 뉴올리언스가 포함된 식민지 루이지애나를 되찾았으나, 식민지 유지가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 1803년 신생독립국 미국에 팔았다. 미국의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지애나 구입(Louisiana Purchase)’으로 알려진 이 거래에서 1500만달러를 지불하고, 하룻밤 새 영토를 두 배로 불렸다. 새로 얻은 땅은 지금의 12개주에 해당한다. 이후 뉴올리언스는 면화 생산과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흑인들의 슬픈 선율이 담긴 재즈가 태어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후 이 도시는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지만, 1860년대에는 미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꼽혔다. 뉴올리언스가 이번에 대형 수재(水災)를 맞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 계속된 도시 확장의 탓이 크다. 1910년대 건축공학자인 볼드윈 우드는 당시까지 방치됐던 강과 호수 주변의 늪지대로 시를 확장하는 개발에 착수했고, 스스로 고안한 양수(揚水)시설로 물을 뽑아냈다. 이어, 연방·시정부가 20세기 내내 해운(海運)과 홍수 방지·도시 확장 등의 목적으로 뉴올리언스 주변의 늪지대를 개발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홍수 때 물을 흡수할 자연적인 ‘완충장치’를 제거한 꼴이 됐다. 개발 이후 뉴올리언스의 시 중심부는 해수면보다 낮은 ‘사발’ 모양이 됐다. 이후 진행된 허리케인 및 홍수 대비 프로젝트는 최고 5단계까지 5등급으로 분류되는 허리케인 중 3단계까지 견딜 수 있게끔 계획된 것이었다. 시민의 목숨을 건 ‘러시안 룰렛’과도 같은 도박이었다.  루이지애나 주정부 차원에서도 운하와 펌프를 보완해 홍수통제 체제를 강화하고, 저지대에 사는 흑인 빈곤층을 보호하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하지만 주정부의 재정 지원 요청은 연방정부와 의회에서 번번이 깎이거나 무시됐다. 결국 ‘4등급 허리케인’이라는 0.5%의 가능성이 현실화했을 때, 뉴올리언스 일대는 무력(無力)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