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암스토롱 공원 : 835 N. Rampart St. New Orleans, LA 70116
루이 암스트롱 공원은 프렌치퀘터 근방에 있습니다. 전설적인 루이 암스트롱과 1800년대 노예의 역사적인 모임장소인 콩고 스퀘어를 보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공원입니다.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으며, 13세경부터 트럼펫(처음에는 코넷)을 배워, 1922년에는 시카고에서 킹올리버 악단에 참가, 이후 많은 악단에서 연주활동을 해왔다. 1925년에는 〈핫 파이브 세븐〉의 취입을 하고, 악단도 조직하였다. '핫 파이브'(Hot Five)의 이름으로 취입된 수십곡은 재즈 사상 불멸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재즈의 산 역사이며 증인이기도 하였던 그의 절정기는 1930년을 중심으로 한 몇해 동안이었다. 1932년에는 다시 유럽으로 가서 영국 국왕의 어전연주를 하기도 했다. 1940년대에는 작은 편성의 올스타즈를 만들었으며, 대전 후에도 세계 각지를 순연하였고, 대한민국을 방문하기도 했다.70세가 넘기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던 그는 영화에도 자주 출연하였으며, 뉴욕 퀸스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트럼펫 솔로의 놀라운 표현에 곁들여 소박하고 개성적인 노래도 부르는 독특한 연기력과 기교로 널리 알려졌다. 레퍼토리도 재즈에서 파퓰러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으며, 음악영화에도 토키 초기부터 수없이 출연하였다.그는 재즈 사상의 거인이며 희대의 솔리스트, 재즈 보컬리스트의 제1인자로 평가받는다.트럼펫 연주자 겸 가수였던 루이 암스트롱은 1927년 이후 스캣을 널리 보급하였다. 스캣은 타악기 리듬에 고정된 음절을 붙여 소리내는 서아프리카의 음악 관습을 그 원조로 삼고 있는 뜻이 없는 음절에 붙인 선율을 열정적으로 부르는 재즈의 즉흥 가창법이다. 일찍이 암스트롱은 가수의 흥을 돋궈주는 역할로서, 특히 블루스 가수 베시 스미스의 노래를 반주해주기 위해 리프(riff: 재즈에서 솔로에 맞추어 연주하는 즉흥적 성격의 짧은 기악 반주)를 연주했다.
소년원 밴드에서 출발한 제왕
루이 암스트롱은 젊은 시절을 미시시피 강의 큰 항구 도시인 뉴올리언스의 옛 크레올 지역에서 보냈다. 그의 부모는 루이가 아직 어렸을 때 헤어졌고,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긴 가난하기 그지없는 흑인 소년에게 누가 관심을 가져주었겠는가. 어린 루이는 당시 미국 남부의 불우한 환경의 흑인 소년들 대개가 그러하듯 몇 차례인가 소년원에 들어갈 뻔했다. 최소한 그가 어느 해인가의 신년 전야에 거리에서 허공에 대고 실탄이 들어있는 권총을 발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결국 루이는 이 사건으로 소년원에 들어가게 된다. 루이에게 소년원은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우연히 소년원 밴드 리더의 눈에 들게 된 루이는 단원으로 뽑히게 되었지만, 그는 악기를 전혀 다룰 줄 몰랐기 때문에 처음엔 탬버린을 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탬버린에서 드럼으로 옮겨갔고, 다시 코넷(cornet : 트럼펫과 비슷한 악기로 흡사한 음색을 지니고 있으나 부드럽다. 트럼펫이 좀 더 힘 있고, 다양한 연주 형태를 구사할 수 있다.) 연주자가 되었다. 이후 루이에게 음악은 마치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 에세이』에서 루이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루이가 매일 아침 나팔을 불면서부터 모두들 즐거운 기분으로 눈을 뜨고, 또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째서일까? 그 까닭은 루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매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일화 -스탯 터클이 『자이언츠 오브 재즈(Giants of Jazz)』란 책 속에서 소개한- 를 아주 좋아한다. 왜냐하면 이 에피소드 하나가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이 우리에게 한없는 평안과 기쁨을 주는 이유는 그 자신이 정말 마음속으로부터 기뻐서 하는 연주가 전염성 때문이 아닐까. 훗날 마일즈 데이비스는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을 존경하지만 그가 백인 청중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음악인이 아닌 마치 광대처럼 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루이 암스트롱은 그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음악을 했고, 그 대상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피부색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1970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을 맞이해 제작된 TV프로그램에서 루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나와 내 음악을 사랑하고, 아시다시피, 나도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어요. 내가 무대에 서는 순간 그들은 시시한 게 아닌 좋은 것을 듣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이 거기에 온 목적과 이유는 자명한 것이지요. … 나 자신이 청중입니다. 내가 광대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광대, 그거 대단한 겁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는 건 행복이지요. 그런 비평가들 대다수가 음도 구별 못합니다. … 연주할 때면, 나는 행복했던 시절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음악은 저절로 나옵니다. 연주할 수 있다는 걸 사랑해야 합니다.” <요아힘 E. 베렌트 지음, 한종현 옮김, 재즈북, 이룸(2004), 106쪽 중에서> 출감 후 루이는 18세 무렵에 뉴올리언스에서 직업 음악인으로 새 출발한다. 어느 날 그는 키드 오리(Kid Ory) 밴드가 거리 공연을 하고 있는 것을 코넷을 들고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 그의 손에 들린 코넷을 보고 누구의 악기를 대신 들고 가느냐고 물었다. 루이는 자기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았다. 대신에 루이는 코넷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그의 말을 믿었다. 루이는 키드 오리 밴드에서 코넷 연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뉴올리언스의 음악인들은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스토리빌의 홍등가가 해군 장관의 명령으로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재즈 뮤지션들 입장에선 직장 폐쇄와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뉴올리언스를 떠났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은 1922년 당대 최고의 트럼페터였던 킹 올리버(King Oliver)가 시카고로 불러들일 때까지 뉴올리언스에 남았다. 많은 이들이 킹 올리버가 루이를 고용한 것은 떠오르는 스타를 자기 밑에 복속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은 훗날 그때 올리버가 자신을 거두어준 것이라고 말하며 도리어 그에 대한 감사함을 드러냈다. 실제로 루이는 킹 올리버를 만나면서 연주 악기를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바꿨고, 놀라운 실력을 보였다. 당시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실력을 나타내는 여러 일화들이 있는데 대개의 내용은 루이 암스트롱의 천재적인 트럼펫 실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루이가 처음 킹 올리버 밴드에서 일할 때 그는 차석 트럼펫 주자였다. 루이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올리버도 인정하고 있었으나 아직까지는 그에게 솔로 연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조니 던이 클럽에 들렀다. 그는 무대에 있던 루이에게 “어이, 꼬마야! 그 나팔을 줘봐. 넌 아직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구나.”라며 그를 무시했다. 평소 루이의 실력을 알고 있던 올리버가 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내버려.” 그러자 루이 암스트롱은 미친 듯이 트럼펫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 뒤로 조니 던은 루이가 일하는 클럽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같은 트럼펫 주자로 실력을 인정받던 독 치트햄은 루이의 연주를 여러 차례 들었고, 그의 연주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루이를 대신해서 몇 번인가 대신 연주를 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한다. “조명 아래서 루이가 <불행한 소녀>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하도 환호성을 질러대는 통에 그가 뭘 연주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조명이 이쪽으로 오면 내가 벌떡 일어나서 힘껏 연주를 했지요. 하지만 환호성은 금방 가라앉고 클럽 전체가 조용해졌습니다. 난 마치 바보처럼 혼자 우두커니 서서 나팔을 불어야 했지요. 몇 년 동안이나 그런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물론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난 루이 암스트롱이 아니었던 거죠.” <빌 크로 지음, 윤태희 옮김, 재즈 우화, 열림원(2001). - 241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