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샤라 지역의 유물
이스라엘 서쪽 지중해 해안 도시로 하이파에서 남쪽으로 약 37㎞, 갈멜산에서 남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에 의하여 주전 25년경에 중건되어 10여년만에 세워진 인공적인 항구도 시로 현재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고 유적만 남아 있다. 이 도시는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이 지역을 헤롯왕에게 하사하여 지은 것인데, 헤롯 왕은 로마황제 가이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도시의 이름을 '가이사랴(Caesarea)'라고 부르게 되었다. 가이샤라는 규모면에서 아주 큰 항구도시였다. 이 항구도시는 깊이가 36.6m나 되는 바다를 거대한 돌로 메워 지중해로부터 부딪쳐오는 방파제를 만들고 그 위에 성벽 과 여러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시장과 경기장, 원형극장, 신전, 로마식 공중목욕탕 등 그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 규모로 건축되었다.특히 가이사랴는 지중해에 위치해 있어서 식수로 사용할 물을 얻기가 어려 워 가이사랴 북쪽에 있는 갈멜산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9km에 달하는 도수교(aqueduct)를 건설했다. 또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의 관저와 행정본부를 두어 행정수도로서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알 려져 있다. 성서 사도행전(10~11)에 나오는 로마 군대 백부장인 고넬료가 가이샤라에 주둔했던 것을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항구로서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었는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이곳에 항구도시 를 건설한 이유는 이 지역에 심한 북풍이 불어 큰 폭풍일 때 마땅히 피할 항구가 없고, 이스라엘 북쪽 도르(Dor)와 욥바(Jaffa) 사이에 좋은 항구가 없어 로마의 문물을 신속히 받아들이고 사마리아의 농산물을 로 마에 수출하는데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가이샤라는 이후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도 계속 발전함으로써 인구가 약 10만명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주후 638년 십자군이 이스람 군대에 의하여 패망하면서 이 거대한 도시 가이샤라는 함락되어 역사 속의 도시로 사라져가게 되었다. 폐허가 된 현장에서 파 괴된 유적들이 발견되면서 지금은 조용히 관광객을 맞고 있다. 유적들 가운데는 십자군 당시에 쌓은 성,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원형 야외극장, 마차경기를 즐겼던 해안의 경기장, 목욕탕 터, 갈멜산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였던 수로가 바닷가에 줄을 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야외 원형극장에서는 지금도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콘서트가 열린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에도 공연을 위하여 돌로 된 스탠드 아래 공간에 의자를 배열하고 무대에선 각종 음향기기를 설치하고 있었다. 무대 앞에 서서 소리를 지르면 소리는 공명이 되어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무엇보다도 관광객들이 환호하는 것은 유적들이 있는 해안에서 짙푸른 망 망대해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독특한 낭만을 즐기는 일이다.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바닷가 전망대에 서면 그 동안 육로를 달려왔던 사람들에게 시원함과 아울러 상쾌함을 선사해 준다. 이곳에선 해변 바위 위에서 고기를 낚는 강태공들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에게 가이샤라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로마 백부장 고넬료는 자신이 주둔하고 있는 가아샤라에서 욥바의 시몬 집에 머물러 있 던 베드로를 모셔오게 하여 고넬료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받게 한다. 이것은 당시로선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19~20) 이 말씀이 처음으로 실천에 옮겨진 이 역사적 사건은 베드로가 유대인이 아닌 로마 사람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기독교 가 유대인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인종과 국가를 초월하여 범세계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 가이샤라는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여러 번 들른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빌립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행 10:1, 21:8) 또 사도 바울은 로마로 이송되기 전에 이곳 가이샤라 감옥에 약 2년간 수감(행 18:22, 21:8, 23:23~33, 24:27, 26:1)되어 있다가 로마로 가서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순례자들은 초대교회 당시 이방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현장 가이샤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한 의인 고넬료에게 내린 성령감림 사 건을 되짚어보며, 이방 선교의 당위성을 앞세워 복음을 들고 지중해를 건넜던 바울의 선교 열정에 감탄하면서 다시 선교의 사명을 다짐해 본다 (퍼옴)